강아지가 두 마리가 있다. 두 마리의 나이는 A 9살, B 11살이다. 각각은 나이에 비하면 굉장히 건강해보인다.
인간 나이로 환산하면 66.2세 69.4세이다. 나이 많은 것 치고는 굉장히 건강하며 활력이 있다.
그럼에도 둘 중에서 9살인 A는 훨씬 더 근육이 강하고 집착적이며 재빠르다. 매너가 없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달리고 공격성은 없지만 적극적이다.. 11살인 B는 성품이 차분하며 굉장히 평화롭다. 산책을 나갔다 와서도 아주 느긋하다.
A와 산책을 나가면 활력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나로서는 이러한 매일 반복되는 것에도 크게 반응하고, 그 작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음에 너무 신기하다.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의 흥분 불안이 전해져오기보다 참으로 작고 귀엽다, 이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동물은 과연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일까(당연히 아니겠지만). 더욱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더욱 귀엽게 느끼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인간인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할 수도 있을까? 상상할 때가 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에 엄하신 하나님이시다!)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고과정이 동물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창의적인 것을 떠올리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적응하며, 궁극적으로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며, 사회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사회상이다. (요즘은 과도한 소비, 향락까지 추가)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 계신다. 강아지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인 우리도 하나님을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쓰여진 성경을 통해서 선지자들의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크나큰 성품과 본질의 일부를 깨달아가는 것일 뿐인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양에 대한 각지를 통한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용어인 물자체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그자체가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크리스천으로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도. 이미 방향성은 주어져있다. 우리는 마음이 동한대로 받아들여지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 책무이다.
우리의 존재가치, 본질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점차적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렇지만 결코 완벽하게 완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하며, 어떠한 해석과 의견에 대해서는 납득이 될 때까지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럴듯하게 전문가나 설교자가 바라보는 방식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방향으로 계속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결코 어둠이 찾아왔을 때에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되지 않았기에, 불완전하기에 아름답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을 질투하기도 했다. 인간의 불완전성,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만 더욱 숭고한, 사랑과 같은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나는 성경 이외에는 완벽히 완결된 진리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은 이전까지 지속되어왔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떤 철학자가 어떤 과학자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하위차원에 있으며 현상들을 바라보고 본질을 추정해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코끼리를 보고 있지만 우리의 눈이 직접 코끼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경이 형태가 아니라 말씀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A와 B의 속도는 다르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끈이 매여있으며, 나를 중심으로 따라가게 된다. 앞서가다가 뒤서가는 작업을 반복하지만, 결국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가 궁극적인 방향성으로 이끌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심은 굉장히 중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몇 번의 질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연결을 해보게 되면 분명 그 이유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과연 깊은 질문과 생각을 하고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했는가. 이러한 반복이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결국 본질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더욱 단단한 결과물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땅 속에서 탄소가 응축이 되어 다이아몬드라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결정체가 생성되듯 말이다. 점차적으로 모아가고 흩어가며, 묶어가며 풀어주는 반복적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알아가고 깨닫게 된다고 생각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명심하자. 매일, 매 순간 높은 차원의 방향성을 추구하자. 낮은 차원의 반복적인 사물과 현상들에 속해 있더라도 정말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며 최선의 결정과 선택을 위해 노력하자. 본질에 집중하자. 성경 말씀에 집중하자.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과 깨달음에 집중하자.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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